2012년 01월 30일
이사에 대한 긴 생각.
난 이사를 굉장히 싫어한다.
그건 아마도 어려웠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걸쳐, 계속해서 이사를 다녔던 기억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사를 좋아하려면, 이사를 통해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을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당장에 허름한 집으로 이사를 간다 하더라도 이게 궁극적으로 변화한 환경을 제공하고, 그래서 결국엔 조금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건 그리 나쁜 이사가 아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가족의 이사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고만고만한 방 한칸짜리 작은 셋집을 전전하곤 했다. 이층 앙옥집에서 진도개를 기르며 살던 시절도 있었다. 세 살 이전의 나날들이었다. 단정하게 지어진 이층 양옥집에 작지만 제대로 된 잔디밭이 있고, 아버지의 차는 포드 마크가 붙어 있는 검은색 마크 파이브였던 그런 나날들도 확실히 있었지만 그 시절은 이제 아주 희미하게 남아 마치 그림자 연극같이 느껴진다. 그 이후 내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사는 모두 1970년대 후반에서 90년대에 걸쳐, 운 없고 요령 없는 한 가족이 어떤 식으로 운명을 맞고 결국에 해체 가족으로 거듭나는가에 대한 역사임에 다름 아니다.
잠시 희망도 있었다. 수십번의 이사를 거친 뒤 95년, 간신히 분양받은 평촌의 큼직하고 깨끗한 새 아파트에 잔금을 치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 가족은 이제 그런 시절은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내 팔을 끌고 평촌 세반과 뉴코아 백화점을 돌며 GE의 투도어 냉장고와 32인치 소니TV, 동양매직의 가스오븐렌지, 웨지우드와 광주요의 그릇 등을 골라 새 주소로 배송을 시켰다. 연한 미색의 고급스런 벽지와, 화이트워시의 나무 마룻바닥을 깐 새 집은 청결하고 널찍했다. 안방엔 어머니가 원하던 거대한 조각 장농과 문갑을 놓았고, 동생과 내 방의 가구는 까사미아. 거실엔 큼직한 TV와 조각한 나무 다리가 달린 가죽 소파. 아마도 90년대 초중반에 걸쳐 이젠 중산층에 편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그런 흔하디 흔한 가정의 모습임에 틀림없는 그런 풍경.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아버지의 심장 수술과 IMF가 동시에 맞물리면서 십몇년에 걸쳐 간신히 이루어낸 집은 마치 사상누각처럼 분해되고 스러져 갔다. 헐값에 넘긴 집은 몇 년 후 고공행진을 시작했고, 팔 때보다 무려 5배 이상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부모의 상대적 박탈감도 덩달아 커졌을 것이다. 그 시기의 일은 자세하게는 모른다. 난 평촌의 집이 처분될 때,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대며 돈 한 푼 없이 일단 집에서 나왔고, 잠시의 가정부 일과 미친듯한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면서도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평촌의 집은 주거 공간으로서는 크게 나무랄 데 없었으나, 그 집에서 살던 시기에 나는 지독하게 불행했고 부모를 증오했으니 볕이 잘 들지 않는 반지하 단칸방일지라도 괜찮다고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시기에 집에서 떨어져 나가 있었기에, 부모의 이혼 사실을 일년이 한참 지난 뒤에서야 알게 된다. 동생은 군대에 가 있던 시기다. 유학 비용을 벌기 위해 취직한 주방에서 직원 등록을 위해 떼어 본 등본을 통해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혼과 함께 내 이름으로 진 빚의 존재를 알게 되어 유학은 포기하고 말 그대로 개처럼 일해서 모든 빚을 갚았다. 당연히 주거 공간은 형편없었다. 작은 빌라의 반지하, 집 문을 열면 칙칙한 회색 벽의 부엌이 바로 보였고, 형광등은 어두침침했다. 보증금 5백에 20. 그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 난 처음으로 친구에게 돈을 빌렸고 하루종일 주방에서 일해 파김치가 되어서도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몇 주를 정신없이 일하다 한 달에 딱 두 번 있는 휴일의 첫번째 날이 되자 난 근처의 페인트 가게에 갔다. 흰 페인트에 노랑 염료를 섞어 계란색으로 조색한 페인트를 한 통 집으로 들고 와 하루종일 부엌을 칠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어둡지만 페인트 덕분에 햇빛이 드는 것 같은 그런 부엌을 생각했을 거다. 싸구려 수성 페인트로는 원하는 효과를 낼 순 없었지만 그래도 칠하니 확실히 나아졌다. 그게 처음 내 힘으로 얻은 나만의 방.
그리고 그 이후로 십년이 지났다. 난 아직도 혼자고, 그 사이 몇 번의 이사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전부 조금씩 나아지는 이사였다. 이 글의 처음에 얘기한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을 획득하는 그런 이사. 하지만 난 여전히 이사가 싫다. 보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되는 것 같은 고만고만한 집들을 보면서 내 미래에 대해서도 회의하고, 간신히 형편에 맞는 집을 고른 뒤 가지고 있는 짐을 추려내고, 버리고, 처분하고, 포장해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떠나는 그런 작업. 내게 이사는 여전히 그런 이미지였다. 나이가 들고, 서른이 넘고, 서른 다섯이 넘고, 이젠 후반으로 접어드는 나이임에도.
그렇게 서른 한 번째 이사가 드디어 코앞으로 다가왔다. 1년 중 가장 집 값이 뛰고, 구하기가 어려우며 집주인들이 배짱을 부리는 시기인 2월. 난 지금 있는 동네에 정이 들어 가급적이면 단지 내 이사를 생각했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비좁지만 오피스텔보다는 나은 주방이 있고, 주변이 조용한 오래 된 주공 아파트. 왠지 내 유년과 청소년기에 걸쳐 그렇게 바라 왔던 작지만 안정적이고 아늑한, 가정의 평화가 있을 법한 그런 동네. 이 동네에서 4년을 살았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니 가급적이면 이 생활을 유지하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지난 금요일, 몇 군데 본 집 중에 간신히 한 군데 골라 계약을 하려던 순간 집주인의 강짜로 어이없이 계약이 취소되고, 난 왠지 모르게 쫓기는 기분으로 홀린 듯 분당의 작은 평수 주공 아파트들을 돌기 시작했다. 다 고만고만한 크기지만 어떤 집들은 미래지향적이고 밝은 느낌이 난다. 하지만 어떤 집들에서는 손 쓸 수 없는 불행과 괴멸의 느낌이 난다. 후자의 집을 보는 순간 나는 간신히 떨쳐낸 빈곤을 자동적으로 떠올린다. 그렇게 몇 집을 돌자 완전히 지쳐 버린다. 마음이 몹시 좋지 않다. 다음 날인 토요일. 역시 몇 집을 살펴 본다. 그 중 그나마 가장 나아 보이는 집을 골라 주변 친구들에게도 보여 준다. 문제는 많지만 그냥 그 집으로 해야 할까 생각한다. 월요일에는 부동산에 연락을 해야지. 그렇게 주말을 맞고, 계속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손을 보아야 하지만 아예 못 살 집은 아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다.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낼 수 없는 월세도 아니다. 하지만 이 시기, 이 지역의 부동산시장의 부조리함에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상황을 냉정하게 복기해 보았다. 2월 20일 전엔 비워 주어야 하니 촉박하다면 촉박하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에도 안 드는 집을 가치에 상회하는 금액을 주고 급히 얻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여기서 타당은 내 스스로에게 납득이 되는 일인가이다- 그런데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 못 하겠다. 난 미혼이고 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 동네를 고집할 이유가 있나. 냉정하게 보면 이 정도의 금액을 낼 가치가 있는 집은 아니다. 내가 이 집에서 느꼈던 평화와 안정은 결국엔 내 스스로의 것이다. 좋은 분위기와 이미지는 결국엔 내 자신이 만드는 거지 집이 만들어 내는 건 아니다. 소중히 여기는 인간관계들도 물론 있었지만 그것들은 어디론가 이사를 간다고 없어질 관계들도 아니다. 게다가 난 출퇴근하는 직업도 아니니 극단적으로 말하면, 짐을 최소한도로 줄인 뒤 남은 건 아버지 집이나 본가에 남아도는 방에 쳐넣고 부평초처럼 제멋대로 몇 달을 돌아다거나 해외에서 몇 년을 머물러도 일과 커리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단순히 지금까지 쌓아 왔던 따스한 가정과 평화, 주거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억지로 마음에도 들지 않는 집을 날짜에 맞추기 위해 얻을 필요는 없다. 안정적인 집은 물론 중요하다. 난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지금까지 지독하게 고생했었다. 하지만 이젠 나 혼자 살 수 있는 작지만 안정적인 주거 공간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나. 나는 혼자고, 모든 것을 버려도 되고 그러고도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 있으니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그게 내가 지금까지 가지기 위해 애써 왔고, 그래서 갖게 된 것이다. 그럼 사용할 때도 그럭저럭 되지 않았나.
그래서 결심했다. 일단 2월동안 물건을 최대한 정리하고, 마음에 드는 좋은 매물이 이 근처에 나오지 않는 한 이 어이없이 미쳐돌아가는 아파트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매물이 널리고 깔린 복층 오피스텔이나 지방의 주공 아파트를 알아보겠다. 알아보니 대전이나 전주도 나쁘지 않을 듯. 서울 경기권 반 가격이더라. 마지막까지 맘에 드는 걸 발견하지 못하면 남은 살림 다 포장해서 아버지 집에 남아돌아가는 방 두 개에 쳐박아 두고 여행이나 다녀야겠다. 일명 좋은 전월세집 구하기 전국 순회 여행.-_- 그러다 보면 인연이 닿는 집이 있겠지 뭐, 하하하. 난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과 나은 삶을 위해서 이사를 하고 싶다, 이제는 확실하게.
자, 그러니 이제 난 마음을 비우고 내일 마감인 일을 합니다... 응?
그건 아마도 어려웠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걸쳐, 계속해서 이사를 다녔던 기억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사를 좋아하려면, 이사를 통해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을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당장에 허름한 집으로 이사를 간다 하더라도 이게 궁극적으로 변화한 환경을 제공하고, 그래서 결국엔 조금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다면 그건 그리 나쁜 이사가 아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가족의 이사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나 고만고만한 방 한칸짜리 작은 셋집을 전전하곤 했다. 이층 앙옥집에서 진도개를 기르며 살던 시절도 있었다. 세 살 이전의 나날들이었다. 단정하게 지어진 이층 양옥집에 작지만 제대로 된 잔디밭이 있고, 아버지의 차는 포드 마크가 붙어 있는 검은색 마크 파이브였던 그런 나날들도 확실히 있었지만 그 시절은 이제 아주 희미하게 남아 마치 그림자 연극같이 느껴진다. 그 이후 내게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사는 모두 1970년대 후반에서 90년대에 걸쳐, 운 없고 요령 없는 한 가족이 어떤 식으로 운명을 맞고 결국에 해체 가족으로 거듭나는가에 대한 역사임에 다름 아니다.
잠시 희망도 있었다. 수십번의 이사를 거친 뒤 95년, 간신히 분양받은 평촌의 큼직하고 깨끗한 새 아파트에 잔금을 치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 가족은 이제 그런 시절은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내 팔을 끌고 평촌 세반과 뉴코아 백화점을 돌며 GE의 투도어 냉장고와 32인치 소니TV, 동양매직의 가스오븐렌지, 웨지우드와 광주요의 그릇 등을 골라 새 주소로 배송을 시켰다. 연한 미색의 고급스런 벽지와, 화이트워시의 나무 마룻바닥을 깐 새 집은 청결하고 널찍했다. 안방엔 어머니가 원하던 거대한 조각 장농과 문갑을 놓았고, 동생과 내 방의 가구는 까사미아. 거실엔 큼직한 TV와 조각한 나무 다리가 달린 가죽 소파. 아마도 90년대 초중반에 걸쳐 이젠 중산층에 편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그런 흔하디 흔한 가정의 모습임에 틀림없는 그런 풍경.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아버지의 심장 수술과 IMF가 동시에 맞물리면서 십몇년에 걸쳐 간신히 이루어낸 집은 마치 사상누각처럼 분해되고 스러져 갔다. 헐값에 넘긴 집은 몇 년 후 고공행진을 시작했고, 팔 때보다 무려 5배 이상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부모의 상대적 박탈감도 덩달아 커졌을 것이다. 그 시기의 일은 자세하게는 모른다. 난 평촌의 집이 처분될 때,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라고 핑계를 대며 돈 한 푼 없이 일단 집에서 나왔고, 잠시의 가정부 일과 미친듯한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면서도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평촌의 집은 주거 공간으로서는 크게 나무랄 데 없었으나, 그 집에서 살던 시기에 나는 지독하게 불행했고 부모를 증오했으니 볕이 잘 들지 않는 반지하 단칸방일지라도 괜찮다고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시기에 집에서 떨어져 나가 있었기에, 부모의 이혼 사실을 일년이 한참 지난 뒤에서야 알게 된다. 동생은 군대에 가 있던 시기다. 유학 비용을 벌기 위해 취직한 주방에서 직원 등록을 위해 떼어 본 등본을 통해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혼과 함께 내 이름으로 진 빚의 존재를 알게 되어 유학은 포기하고 말 그대로 개처럼 일해서 모든 빚을 갚았다. 당연히 주거 공간은 형편없었다. 작은 빌라의 반지하, 집 문을 열면 칙칙한 회색 벽의 부엌이 바로 보였고, 형광등은 어두침침했다. 보증금 5백에 20. 그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해 난 처음으로 친구에게 돈을 빌렸고 하루종일 주방에서 일해 파김치가 되어서도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몇 주를 정신없이 일하다 한 달에 딱 두 번 있는 휴일의 첫번째 날이 되자 난 근처의 페인트 가게에 갔다. 흰 페인트에 노랑 염료를 섞어 계란색으로 조색한 페인트를 한 통 집으로 들고 와 하루종일 부엌을 칠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어둡지만 페인트 덕분에 햇빛이 드는 것 같은 그런 부엌을 생각했을 거다. 싸구려 수성 페인트로는 원하는 효과를 낼 순 없었지만 그래도 칠하니 확실히 나아졌다. 그게 처음 내 힘으로 얻은 나만의 방.
그리고 그 이후로 십년이 지났다. 난 아직도 혼자고, 그 사이 몇 번의 이사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전부 조금씩 나아지는 이사였다. 이 글의 처음에 얘기한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을 획득하는 그런 이사. 하지만 난 여전히 이사가 싫다. 보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되는 것 같은 고만고만한 집들을 보면서 내 미래에 대해서도 회의하고, 간신히 형편에 맞는 집을 고른 뒤 가지고 있는 짐을 추려내고, 버리고, 처분하고, 포장해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떠나는 그런 작업. 내게 이사는 여전히 그런 이미지였다. 나이가 들고, 서른이 넘고, 서른 다섯이 넘고, 이젠 후반으로 접어드는 나이임에도.
그렇게 서른 한 번째 이사가 드디어 코앞으로 다가왔다. 1년 중 가장 집 값이 뛰고, 구하기가 어려우며 집주인들이 배짱을 부리는 시기인 2월. 난 지금 있는 동네에 정이 들어 가급적이면 단지 내 이사를 생각했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비좁지만 오피스텔보다는 나은 주방이 있고, 주변이 조용한 오래 된 주공 아파트. 왠지 내 유년과 청소년기에 걸쳐 그렇게 바라 왔던 작지만 안정적이고 아늑한, 가정의 평화가 있을 법한 그런 동네. 이 동네에서 4년을 살았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니 가급적이면 이 생활을 유지하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지난 금요일, 몇 군데 본 집 중에 간신히 한 군데 골라 계약을 하려던 순간 집주인의 강짜로 어이없이 계약이 취소되고, 난 왠지 모르게 쫓기는 기분으로 홀린 듯 분당의 작은 평수 주공 아파트들을 돌기 시작했다. 다 고만고만한 크기지만 어떤 집들은 미래지향적이고 밝은 느낌이 난다. 하지만 어떤 집들에서는 손 쓸 수 없는 불행과 괴멸의 느낌이 난다. 후자의 집을 보는 순간 나는 간신히 떨쳐낸 빈곤을 자동적으로 떠올린다. 그렇게 몇 집을 돌자 완전히 지쳐 버린다. 마음이 몹시 좋지 않다. 다음 날인 토요일. 역시 몇 집을 살펴 본다. 그 중 그나마 가장 나아 보이는 집을 골라 주변 친구들에게도 보여 준다. 문제는 많지만 그냥 그 집으로 해야 할까 생각한다. 월요일에는 부동산에 연락을 해야지. 그렇게 주말을 맞고, 계속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손을 보아야 하지만 아예 못 살 집은 아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다.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낼 수 없는 월세도 아니다. 하지만 이 시기, 이 지역의 부동산시장의 부조리함에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상황을 냉정하게 복기해 보았다. 2월 20일 전엔 비워 주어야 하니 촉박하다면 촉박하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에도 안 드는 집을 가치에 상회하는 금액을 주고 급히 얻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여기서 타당은 내 스스로에게 납득이 되는 일인가이다- 그런데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 못 하겠다. 난 미혼이고 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 동네를 고집할 이유가 있나. 냉정하게 보면 이 정도의 금액을 낼 가치가 있는 집은 아니다. 내가 이 집에서 느꼈던 평화와 안정은 결국엔 내 스스로의 것이다. 좋은 분위기와 이미지는 결국엔 내 자신이 만드는 거지 집이 만들어 내는 건 아니다. 소중히 여기는 인간관계들도 물론 있었지만 그것들은 어디론가 이사를 간다고 없어질 관계들도 아니다. 게다가 난 출퇴근하는 직업도 아니니 극단적으로 말하면, 짐을 최소한도로 줄인 뒤 남은 건 아버지 집이나 본가에 남아도는 방에 쳐넣고 부평초처럼 제멋대로 몇 달을 돌아다거나 해외에서 몇 년을 머물러도 일과 커리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단순히 지금까지 쌓아 왔던 따스한 가정과 평화, 주거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억지로 마음에도 들지 않는 집을 날짜에 맞추기 위해 얻을 필요는 없다. 안정적인 집은 물론 중요하다. 난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지금까지 지독하게 고생했었다. 하지만 이젠 나 혼자 살 수 있는 작지만 안정적인 주거 공간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나. 나는 혼자고, 모든 것을 버려도 되고 그러고도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 있으니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그게 내가 지금까지 가지기 위해 애써 왔고, 그래서 갖게 된 것이다. 그럼 사용할 때도 그럭저럭 되지 않았나.
그래서 결심했다. 일단 2월동안 물건을 최대한 정리하고, 마음에 드는 좋은 매물이 이 근처에 나오지 않는 한 이 어이없이 미쳐돌아가는 아파트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매물이 널리고 깔린 복층 오피스텔이나 지방의 주공 아파트를 알아보겠다. 알아보니 대전이나 전주도 나쁘지 않을 듯. 서울 경기권 반 가격이더라. 마지막까지 맘에 드는 걸 발견하지 못하면 남은 살림 다 포장해서 아버지 집에 남아돌아가는 방 두 개에 쳐박아 두고 여행이나 다녀야겠다. 일명 좋은 전월세집 구하기 전국 순회 여행.-_- 그러다 보면 인연이 닿는 집이 있겠지 뭐, 하하하. 난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과 나은 삶을 위해서 이사를 하고 싶다, 이제는 확실하게.
자, 그러니 이제 난 마음을 비우고 내일 마감인 일을 합니다... 응?
# by | 2012/01/30 02:37 | 개삽질-_- | 트랙백 | 덧글(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