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도락
아침에 바이올린 수업이 있는 관계로 일찍 자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그냥 밤을 새고 수업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바이올린 수업을 듣는 날에는 모두 밤을 새우고 갔었구나..;
시간때우는 용도로 또 글을 끄적거린다.

나는 불면증이 있다. 어제오늘 생긴 것도 아니고 중학교 2학년때부터 지금같은 상태였던 걸로 기억한다. 누워 있어도 아침 나절까지 잠이 오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중학교때는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다. 지금은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일단은 혼자 살아서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면 되는데, 그때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한참 집이 어려울 때여서 반지하 단칸방에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그러니 밤 늦게까지 불을 켜는 것도 안 되고, 그냥 어둠속에 누워서 잠을 청하려고 노력할 뿐. 덕분에 나와 동생이 자는 줄 알고 밤에 일어나 부부싸움 하는 부모님의 소리는 한 번도 안 놓치고 다 들었다.-_-; 그때는 늦게까지 불을 켜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내 방을 갖는 게 가장 커다란 소원이었다. 그래서 이모네 집에 얹혀살 때는 사촌오빠들의 방에 연결되어 있는 사용하지 않는 재래식의 부엌 바닥에 벽돌을 쌓고 널빤지를 올린 뒤 장판을 깔아 방을 만들기도 했다. 나 하나가 간신히 누워 잘 정도의 크기에 난방이 안 되니 겨울엔 춥고, 환기가 안 되나 여름엔 더웠지만 그래도 밤에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었다. 다시 단칸방으로 이사를 간 뒤엔 아버지가 툭하면 켜 놓고 주무시는 텔레비젼의 불빛으로 책을 읽었다.

대학 2학년때 평촌의 새 아파트로 이사갈때까지 이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새 아파트에는 내 방이 있었다. 밤새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평촌의 아파트에서 제일 좋았던 건 가까이에 24시간 영업하는 킴스클럽이 있다는 거였다. 그 때는 이미 부모님의 사이가 어긋나기 시작했던 시점이어서 두 분 다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기 때문에 집엔 대부분 나 혼자밖에 없었다. 집에서 책을 읽다가 밤바람이 쐬고 싶으면 새벽 3~4시쯤 자전거를 타고 터무니없이 크고 사람이 없는 킴스클럽으로 갔다.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윗층부터 아랫층으로 죽 내려오면서 매장을 샅샅이 구경했다. 신제품이나 모르는 식재료들, 마트에 흔히 있는 보급형 와인의 라벨을 읽었다. 그리고 분스베리라든지 뱅 드 테이블 급의 싸구려 와인을 한 병 사들고 병째 와인을 마시면서 집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다 중간에 있는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기도 했다. 혹시 새벽 3~4시쯤 평촌 범계역 근방에서 자전거를 질질 끌고 와인을 병나발로 불면서 차도 위를 무단횡단하는 머리가 징그럽게 긴 여자아이를 봤다면 그건 바로 나다.-_-;;

그러다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아파트는 헐값에 팔리면서 나름대로 괜찮았던 밤의 도락도 끝났다.

지금은 그런 싸구려 와인이 아닌 먹을만한 와인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은 있고, 오랫동안 바래왔던 대로 혼자 살고 있지만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 대부분의 새벽엔 그때의 일들이 자주 떠오른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와 삐걱거리는 그네와 가끔 한두대의 차가 지나가던 커다란 도로와 지은지 얼마 안 되어 시멘트 냄새가 나던, 카트 끄는 소리만이 들리는 킴스클럽.
건조하면서도 농밀했던 시간.

지금도 가까이에 킴스클럽이 있다면 이런 글을 끄적이지 않아도 될 텐데.








by kyoko | 2005/03/08 05:25 | 개삽질-_- | 덧글(16)
Commented by zuppy at 2005/03/08 21:40
당신, 큐트인줄 알았는데, 만땅 우울 캐릭터..
Commented by kyoko at 2005/03/09 02:03
절훤-_-속으셨군요 호호호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바쁘신가봐요*_*
Commented by griselle at 2005/03/09 02:53
와인 콜크는 어떻게 따셨어요? ^^; 과천 살았었는데 과천에 있던 킴스클럽은 곧 11시까지 영업으로 바뀌었었어요. 평촌 킴스클럽은 아직 24시간 영업 하려나..
Commented by moyamo at 2005/03/09 07:54
눈물나요...지금...우울하네요...아침부터...
Commented by kyoko at 2005/03/09 13:02
griselle님/역시 그걸 궁금해하시는 분이 계시군요^^;
분스베리는 싸구려 와인(이라기보다는 그냥 과일향 술)이라 마개가 콜크가 아니라 그냥 돌려따는 금속마개랍니다. 흑흑.
그리고 테이블 와인들도 금속마개가 있긴 한데 혹시 몰라서 마트에서 주는 보급형 스크류를 들고 다녔다는;;(그런데 그걸로 따는 건 참 어렵더군요;)
그건 그렇고 과천 사셨군요^^ 저도 서울서 자취한지 벌써 7년째라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평촌 킴스는 지금은 그냥 백화점같이 변하고 지하 1층만 24시간 마트가 되었을거예요. 이제는 반포 킴스가 제일 크고 24시간 영업을 할듯..
Commented by kyoko at 2005/03/09 13:03
moyamo님/ 에고 아침부터;; 죄송합니다..ㅠ.ㅠ
그래도 아무쪼록 좋은 하루 되셔요.
Commented by moyamo at 2005/03/10 00:27
죄송하긴요. 저한테 죄송할게 뭐가 있습니까.
괜찮아요. 오히려 눈이 촉촉해져서..(안구 건조증이 있어서리)
그런데 진짜로 tv에서나 보던 인간극장을 보는듯 했습니다.
Commented by kyoko at 2005/03/10 03:52
다들 살면서 나름 고생하고 있지 않을까요^^;
어릴때는 참 불만이 많았는데 이젠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불행한 삶은 아니었던 것도 같구요..ㅎㅎ
Commented by moyamo at 2005/03/11 09:32
싸구려 와인을 한 병 사들고 병째 와인을 마시면서 집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다 중간에 있는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기도 했다. ---> 눈물나.. 눈물나..T.T
Commented by kyoko at 2005/03/11 15:51
흑 나름대로 즐거운 추억인데요;;
Commented by 소마 at 2005/03/15 04:38
전 만화보는 절 구박하시는 아버지 눈을 피해서 밤마다 자전거를 끌고 미친듯이 옆 동에 있는 대여점으로 향하는 나날이었습죠. 밤이다 보니 밤 특유의 냄새가 바람에 섞였는데, 뭐랄까 밤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서 계속 밖에 머물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요. 때론 그게 생각나서 밖에 자전거를 끌고 나가기도 했지요.
Commented by kyoko at 2005/03/15 05:23
소마님/ 저희 집은 대학가서도 그모양이니 그냥 포기하시더라구요. 가끔 화는 내셨지만..
밤 공기에는 참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중세에는 밤 공기가 여자들을 임신시킨다고-_-;;밤외출을 금하기도 했다는데요, 나름 납득이 간달까요^^;(묘한 기분이 들게 하니 원..-_-;)
Commented by 독심호리™ at 2005/11/15 17:45
올해부터 범계역에 사는데 이 글 읽으니 묘하군요 ^^
Commented by Tristan at 2005/11/26 23:56
노 코멘트일수밖에 없군요.
Commented by 파나생수 at 2007/04/09 15:56
이 블로그를 알게 돼서 단숨에 여러 글을 읽었는데 이 글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하루 지나서 생각나서 다시 읽어보고 답글 답니다. 글을 참 잘 쓰시네요. 저도 어렵다면 어려웠다고 할 수 있는, 하지만 그게 지금 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면 감사하게 느껴지는 그런 시기가 있는데, 글을 읽다 보니 저도 옛날 생각이 나네요. 밤거리를 혼자 배회하는 취미는 아직도 못버리고 있죠 저도..
Commented by brilliance at 2007/05/25 00:45
협궤열차 글과 함께 참 잔잔한 글이군요.. 저도 한때 불면증이 있었던 터라 심히 공감 가는 내용이 많네요.

요새는 그래도 전공책 덕에 불면증은 없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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