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

이제는 방 공기가 차가워졌다. 핑크색의 두꺼운 가운이 포근하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침대시트를 갈고 화사한 꽃무늬의 새 이불을 깐다. 바삭하게 잘 마른 이불 안에 들어가 새로 간 꽃무늬의 베개커버에 머리를 대고 잠을 청해 본다. 몇시간을 뒤척이다 수면제를 먹어야 하는 걸까 잠시 생각한다. 얕고 괴로운 잠을 자는 것보다는 멍한 채로 깨어 있는 쪽을 선택하고 다시 컴퓨터를 켠다. 그리고, 뭔가를 쓴다.
내가 섹스를 좋아하는 건 그 짓을 할 때만큼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내 위에 있는 그 애가 나에게 어떤 일을 해 주는지만 느끼면 된다. 마약성 진통제를 맞았을 때의 그 기분, 지독한 통증이 멀어지고 고통이 내 것이 아니게 되는 순간과도 비슷하다. 중독적이다. 머릿속에서 쾌감이 하얗게 점멸한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 애를 보면 곧바로 자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로 섹스를 하고,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아주 깊고 아득한 잠에 빠진다. 딱딱한 사탕처럼 굳어버린 불면이 서서히 달콤하게 녹는다. 그 짓을 할 때만큼은 그 애도 나도 행복해진다. 나라는 인간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건 그 순간뿐일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음란하게 변하고 싶어. 쾌감을 위해 수치를 버릴 수 있을 만큼. 그러나 빌어먹을, 나는 아직도 제정신인 것만 같아. 이젠 그럴 필요도 없는데.
몹시 헝클어진 뇌로 애써 뭔가를 생각하려 한다. 꼭 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었던 것 같다. 몇천년동안 각기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해 왔을 이야기. 나는 네가 필요해. 진통제처럼. 모르핀, 코데인, 펜타조신과 같이 강력한 진통제. 머릿속의 모든 걸 지워주고 나를 재워줄 만한 것. Let me see the light, baby. 무릎을 굽혀 차갑게 된 맨발을 의자에 올리고 손으로 감싸서 덥힌다. 온도는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다. 따스해질 수 있을까, 네게 머리를 기대고 힘을 뺄 수 있을까. 그래서 행복하게 될까.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필요하게 되고, 그래서 다시 모든 걸 버리고 뒤로 향해 달려가게 될까봐 두려워져.

잠이 오지 않아 몽롱한 미드나잇 블루의 새벽엔 잊고 있었던 것들이 갑자기 생각난다. 이미지와 감정은 한없이 어둡고 깊어서 그 속에 침잠되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다. 그런 새벽에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배설을 위해 위와 같은 것들을 끄적인다. 그러면 잊어버릴 수 있다. 당분간은 괜찮을 거다. 그걸로 된 거야.
아아, 다행이다.


by kyoko | 2005/09/15 05:59 | 개삽질-_-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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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좀비君 at 2005/09/15 06:05
머릿속에 오만생각이 떠돌고 있을 때의 수면은 확실히 불편합니다. 요새는 정말로 생각없이 사는 건지 보통은 눕자마자 잠이 들어버립니다만...이따금씩 생각이 꼬리를 물어서 잠을 자기가 힘드네요. 역시 사람에게는 안심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네모스카이시어 at 2005/09/15 06:18
저도 왠지 밤에 잠을 잘 못자는 편입니다. 전에는 수면제라도 되는 양, 술을 들이키곤 했지만 지금은..
Commented by Frey at 2005/09/15 07:27
어젯밤엔 열한시에 잤다가 세시에 깨어서, 지금까지 깨 있습니다.
Commented by 알바트로스K at 2005/09/15 08:45
밤의 마력이란 무섭죠...(웃음)
Commented by luxferre at 2005/09/15 09:06
회사원이 되고는 출근관리 때문에 못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불면의 자학을 가하곤 했습니다. 미친듯이 달리고 온다거나 잠이 안오는데도 커피를 마시고 진통제를 먹고 억지로 무언가를 하고 그렇게 벼랑끝까지 몰아서 떨어질때 잠이 들곤 했었죠..
당분간도 앞으로도 계속 괜찮아 지실 겁니다. 힘내세요.
Commented by Ernesto at 2005/09/15 12:09
저도 요즘들어서는 밤에 일찍 잠들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침에도 일찍 못일어나지요..) 잠이 오지 않을때 억지로 잠을 청하는것만큼 힘든 일도 없더군요. 수면제를 먹는것도 하루이틀이고.. 머릿속이 복잡한 새벽에는 슬픈 영화를 보면서 웁니다. 울고 나면 마음도 편해지고 눈이 피곤해서 잠도 잘 오더군요...

정말 좋은 사람과 섹스를 하고 난 후에 같이 잠드는 것 만큼 좋은 것도 없지요.. 자주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게 무척 슬픈일이지만요..ㅎㅎ
Commented by jihi at 2005/09/15 13:55
안녕하세요.열혈 애독자이지만 눈팅만 하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전 kyoko님의 만담도 무척 좋아하지만 가끔 이런식의 글을 쓰실 때가 너무 좋아요. 힘들게 쓰시는 글에 괜한소리 같지만 제가 속으로 생각만 했던 게 글로 변해 있는 것 같아서 몇번씩 더 읽게 됩니다.글 정말 잘쓰시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너무 힘들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푹 주무시고 힘내셔요~~~!!^^
Commented at 2005/09/16 00:0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o at 2005/09/16 10:13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또 다른 순간은 요리를 먹이는 순간이겠죠. 요리 잘하신다고 했잖아요. 벌써 두가지용도로 쓸모있는 여자이십니다. 화이팅!
Commented by 카이엔 at 2005/09/16 19:08
교코님 넉넉한 한가위 되셔요^^
Commented by Kana at 2005/09/16 20:18
홧팅 홧팅~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_-*
Commented by RocknCloud at 2005/09/16 20:27
건강하셔야 해요.

넉넉하고 행복한, 즐거운 한가위 되시길~~~ ^^
Commented by 인시 at 2005/09/16 22:40
울지 마세요'ㅅ'..
Commented by Arsia at 2005/09/18 02:51
정신없이 바빠서 집에오면 엄청 졸려 베게에 머리가 닿으면 바로 곯아떨어지는것이 정말정말 좋다고 생각되는 요즘입니다.
확실히 잘라고 누웠는데 오만 잡스런것들이 머릿속에 가지를 쳐대기 시작하면 정말 걷잡을 수 없어요. ㅜ.ㅜ
나중에는 더이상 자랄 수 없는 생각의 나무를 보며 그 씨앗이 어느놈이었는지를 거슬러 내려가는것도 그럭저럭 재미있지만, 역시나 저~ 땅 속 깊숙히 묻혀있던넘을 끄집어 내면 이미 시간은 흘러흘러 창 밖에서 닭이 홰를 치고있죠.
격렬한 섹스후 둘다 땀에 살짝 젖은채로 파트너의 살에 기대어 잠드는것.. 환상입니다.
복상사가 최고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닌가봐요. (이거랑 그거랑 다른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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