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문득 깨달았어.

세상에.
이글루를 만든 지 벌써 일년이 넘었다니.


일년동안 나는 스물 아홉살에서 서른 살이 되었고, 4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었고,
10년동안 내 옆에 있었던 가장 친한 남자친구와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게 되었고,
몇개인가의 연애 사건에 휘말렸으며, 새로운 술친구들이 생겼고,
조금 더 뻔뻔스러워졌고, 조금 더 거짓말을 잘 하게 되었으며,
그러면서도 묘하게 솔직하게 굴고, 그래서 여전히 복잡한-결국엔 변한 것 없는- 서른 살의 미숙아로 지냈다.
다시 새해가 다가오고 나는 곧 서른 한 살이 된다. 올 연말에도 여전히 베토벤 9번을 예매한다. 새 구두는 언제나 빨간 박스 안에 있으며 캐시미어 코트는 잘 손질이 되어 드레스룸에 걸려 있고 나의 까만 고양이 쿠로는 내 옆에서 몸을 둥글게 만 채 자고 있다. 마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만 같아. 그렇지만 그 동안의 일들은 이글루에 조각조각 퍼즐처럼 흩어져 있다. 아마도 내 자신조차 맞추기 어려울 게 틀림없는 그런 자디잔 퍼즐.



그냥 아무 생각 없는 잡담과 배설-_-;을 위해 작년 11월 20일에 만들었던 이글루가 1년동안 10만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다녀간 곳이 되었다. 새삼스럽지만 놀라울 따름. 이렇게 오랫동안 해 나갈 거라고는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이글루가 나에게 있어서 뭔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보지도 않았지만.
여기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이것저것 얘기도 하고. 혼자서 끄적대는 지극히 개인적인 그 모든 허접쓰레기같은 글을 하루에 몇백, 때로는 천명이 넘는 사람이 읽어 준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하기도 하고.-아니, 가끔은 그것 때문에 오히려 혼자라는 걸 자각했던 순간도 있고.- 여기서 누군가를 만나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음담패설을 하고. 술이 깨면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내밀하며 부끄러운 얘기를 하기도 했었고(세상에.) 지금도 그러고 있다는 게 너무나 신기해.

언제나 그랬듯이 왜 이곳에 글을 쓰는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나는 문학소녀가 아니고, 그냥 저질스런 속물에 불과한 인간이라 믿는다. 내 일상은 보통의 인간들처럼 하잘것없으며 가끔 빛나는 순간은 글로 남길 수조차 없다. 가끔 떠오르는 생각들, 이미지와 엑스타시는 글이 되면 더 이상 빛나지 않고 찌든 낙엽처럼 바스라진다. 그렇지만 언젠가 이글루에 썼던 이 문장을 떠올린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죽는 편이 더 달콤할 것만 같은 전쟁. 절대로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상실감. 하지만 그게 두려운가를 반문하면 그건 아니다. 나는 언제나 무모했으며, 내가 무서워하는 건 굴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디스트일 수밖에 없다. 가끔은 마음 속의 연한 부분이 건드려지고, 그래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게 되어도 내가 그것을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노다. 그래서 나는 싸워 나가겠다. 가장 중요한 것을 갖지 못하게 되어도, 내 머릿속에서 언제나 플래쉬백되는 것들. 엑스타시와 이미지. 관념.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들.
그래도 나는 그것을 쓰겠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아직은.

by kyoko | 2005/11/27 23:49 | 개삽질-_- | 트랙백(1) | 덧글(7)

트랙백 주소 : http://cool120p.egloos.com/tb/197153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Dreamer's dr.. at 2005/11/28 02:40

제목 : 생전 처음한 트랙백과 커피 한잔의 마법.
그러고 보니 문득 깨달았어. 쿄코님의 이글루에서 허락 없는 트랙백.[<어이..;] 하루종일 벼락치기식 시험공부를 하고 침대에 앉아 부들부들한 담요를 둘러 덮고 노트북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링크 새글 업데이트 중에 쿄코님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글을 읽고 상당......more

Commented by 좀비君 at 2005/11/28 00:00
그런 면에서 블로그는 퍼즐 게임같다는 생각도 종종 들곤 합니다. 조각조각 나눠진 자신의 모습을 담아놓고 그걸 맞추면 '나'라는 사람이 나타나는...조각이 모자라는 불완전한 퍼즐게임이랄까요.
Commented by 알바트로스K at 2005/11/28 00:10
블로그 자체에 대해 쓴 글중 가장 서정적인 글 중 하나로 기억하겠습니다 (웃음)
Commented by Arsia at 2005/11/28 00:19
확실히.
내가 어디다 쓴 글을 누군가 읽어주고 흔적을 남겨준다는것.
의미가 다른 오르가즘을 느끼게하죠.
블로그를 만들어서 사람을 모이게 하는거 굉장히 부러운 일입니다.
하고싶다고 되는것도 아니고, 아무나 다 되는것도 아니며, 싫다고 막을 수 도 없는 일이죠. (아 막을 순 있겠군요. 닫아버리면되니.)
어디 한 구석탱이에 내기 만드는 환상세계를 풀어놓을 수 있다는건 좋은것 같아요.
맘이 통하는 이성 혹은 동성친구 보다 가끔은 이런 작은 공간이 더 편할때도 있구요.
인터넷.
인간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 아닐까요? ^^
Commented by Ж가이샤Ж at 2005/11/28 01:34
쿄코님의 말씀과 밑에 리플들의 말에 모두 동감합니다아.
정말 확 와닿는 글이네요. 거기에 평소 쿄코님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삶을 살아나가시는지 잘 표현되어 있는것도 같고..^_^
전 쿄코님의 글이 좋아요. *>_<* 앞으로도 그 삶의 조각들을 함께 나누고 더듬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날이 쌀쌀해 지는데 건강에도 유념하세요-*
Commented by rorudsoo at 2005/11/28 14:10
흠..... '볼때마다 커지는 것 같아' 가 '볼때마다 작아지는 것 같아' 보다는 정답게 들릴 거라는 건 확실해요.......
Commented by kyoko at 2005/11/28 21:41
좀비君님/ 그렇죠. 가끔은 여기 있는 글들이 분명히 제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생소합니다.

알바트로스K님/서정적;; 전 왠지 건조해 보이는데요-_;

Arsia님/음.. 환상세계라. 사실 전 저란 인간에 대해 1그람의 환상도 없는 무미건조한 뇬이라-_;;
그냥 글로라도 안 쓰면 정말 맹구수준의 사고를 하게 될 것 같아서 가끔 뭔가를 써야겠다고 애를 쓰지만.. 그래봤자 바보인 것 같아요. 흑.
Commented at 2005/11/29 00:43
비공개 덧글입니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