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 23일
와인 두 병.
11월 초의 레스토랑. 하얀 트리에 빛나는 블루와 은색 장식이 눈부셨고, 테이블보는 여전히 햐얗고 빳빳했다. 냅킨의 리본조차 벌써 크리스마스다. 맞은편에는 잘 모르지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예민하고 멋진 아가씨가 앉아 있다. 그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메뉴를 고른다. 메뉴판에는 각종 허브와 신선한 고기, 맛있는 파스타가 가득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할 정도로 행복해진다. 와인은 끼안띠 클라시코. 보르도잔에 서빙된 짙은 가넷색의 액체를 홀짝거리며 대화를 나눈다. 케이크라는 단어에선 왜 달콤한 설탕 냄새가 나는 걸까. 차례대로 요리가 서빙되어 나오고 줄지어 있는 은색의 포크와 나이프는 조금씩 줄어들어 간다. 그리고, 선물을 받았다. 마치 크리스마스 같아. 야마모토 후미오의 신간이 내 손에 놓여진다. 그녀는 나를 생각하며 이 책의 표지를 그렸다고 한다. 나의 구두와 가방. 서른 한 살의 방. 서른 한 가지의 이야기. 표지를 들추자 봉투가 하나 있고, 그 안엔 그녀가 그리고 만들었던 아름다운 것들의 사진으로 가득하다.
내가 지금까지 받았던 가장 멋진 선물.
이젠 11월도 거의 다 지나갔다. 가끔 있는 폭식의 날. 아직 밤 아홉시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와인을 두 병째 땄다. 랑그독 루시용의 루 마세를 빠른 속도로 비우고, 두 번째 병에 스크류를 돌려넣는다. 코르크 빠지는 소리는 언제나 경쾌하고 가볍다. 블랙체리와 초콜렛 향이 나는 끼안띠 슈페리어를 홀짝거린다. 안주는 다크 초콜렛. 조금씩 속이 울렁거려 온다. 와인병을 기울이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방 안은 플럼과 베리, 달콤한 초콜렛의 향으로 가득차서 이제는 토할 것 같아. 창고에 넣어 둔 커다란 트리와 금색, 은색의 볼을 꺼내야 될 때가 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밀린 일들을 마무리짓게 되면 조금쯤 나아질까. 이제 곧 크리스마스야. 라고 언젠가는 분명 마법과도 같았던 말을 속으로 되뇌이지만 이미 그 마법은 빛이 바래 버린 것만 같다. 서른 한 살의 크리스마스는 찬란하게 빛나던 레스토랑에서 조금 일찍 끝나버린 걸까. 사실은 알고 있다. 이젠 크리스마스에 누군가에게 하늘색 상자를 받고 하얀 리본을 푸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일어나도 그건 더 이상 마법이 아니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티파니의 쇼윈도를 바라보던 이십대 초반엔 그런 게 마법이었던 적도 분명히 있었겠지. 하지만 이젠 혼자서 티파니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나올 수 있고, 진심으로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지금 내 손가락에서 차분하게 빛나고 있는 건 심플한 밀그레인 링이고 그건 네가 준 게 아니라는 사실이 언제나 나를 안도하게 한다. 올해야말로 다른 반지를 사 볼까 생각한다. 하늘색 박스 안에 들어 있는 조금 더 사이즈가 큰 밀그레인 링은 그냥 나의 수많은 악취미 중 일부일 뿐이지. 아무 생각 없이 머릿속을 차갑게 하고 단어를 나열해 퍼즐을 맞추기 시작한다. 와인의 딸기향과 오늘 지나가면서 본 어느 쇼핑센터의 레드와 그린 장식 같은 사소한 게 무언가를 움직여 잊고 있던 것들이 다시 돌아온다. 새벽 3시, 빙 크로스비의 캐롤이 흐르는 아무도 없는 24시간 쇼핑센터. 분스베리를 한 병 집어들고 5천원짜리 지폐를 내민 뒤 자전거의 페달을 굴려 차갑고 딱딱한 엷은 눈발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었던 어느 크리스마스. 집에 돌아와서는 덤으로 받은 판촉용 와인잔에 싸구려 와인을 따르고 조그맣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목소리를 내다가 내 목소리에 그만 내가 놀라 버렸었던. 머릿속이 그런 것들로 갑자기 가득 차 버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 게 그리운 건 아닌데도.
와인 두 병의 효과는 상당히 좋아서 잊고 있었던 퍼즐들이 순식간에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가장 소중했던 것들을 다시 찾은 것만 같아. 그러나 알고 있다. 절대 맞춰지지 않을 그림. 그걸 하나하나 맞추는 건 사실은 아무 의미 없다는 것, 네가 다시 전화를 하고, 지나버린 무언가에 대해 얘기를 해도 결국엔 잊는 편이 낫다는 것도. 내가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것은, 끝난 것이다.
그저 그 뿐이다.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퍼즐을 맞추려는 시도 따윈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결국엔 그저 그런 결론. 이걸 변화시키려면 와인 두 병으로는 어렵겠지.
정말 다행이야. 와인 두 병이 적량인 내 자신이.

내가 지금까지 받았던 가장 멋진 선물.
이젠 11월도 거의 다 지나갔다. 가끔 있는 폭식의 날. 아직 밤 아홉시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와인을 두 병째 땄다. 랑그독 루시용의 루 마세를 빠른 속도로 비우고, 두 번째 병에 스크류를 돌려넣는다. 코르크 빠지는 소리는 언제나 경쾌하고 가볍다. 블랙체리와 초콜렛 향이 나는 끼안띠 슈페리어를 홀짝거린다. 안주는 다크 초콜렛. 조금씩 속이 울렁거려 온다. 와인병을 기울이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방 안은 플럼과 베리, 달콤한 초콜렛의 향으로 가득차서 이제는 토할 것 같아. 창고에 넣어 둔 커다란 트리와 금색, 은색의 볼을 꺼내야 될 때가 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밀린 일들을 마무리짓게 되면 조금쯤 나아질까. 이제 곧 크리스마스야. 라고 언젠가는 분명 마법과도 같았던 말을 속으로 되뇌이지만 이미 그 마법은 빛이 바래 버린 것만 같다. 서른 한 살의 크리스마스는 찬란하게 빛나던 레스토랑에서 조금 일찍 끝나버린 걸까. 사실은 알고 있다. 이젠 크리스마스에 누군가에게 하늘색 상자를 받고 하얀 리본을 푸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일어나도 그건 더 이상 마법이 아니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티파니의 쇼윈도를 바라보던 이십대 초반엔 그런 게 마법이었던 적도 분명히 있었겠지. 하지만 이젠 혼자서 티파니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나올 수 있고, 진심으로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지금 내 손가락에서 차분하게 빛나고 있는 건 심플한 밀그레인 링이고 그건 네가 준 게 아니라는 사실이 언제나 나를 안도하게 한다. 올해야말로 다른 반지를 사 볼까 생각한다. 하늘색 박스 안에 들어 있는 조금 더 사이즈가 큰 밀그레인 링은 그냥 나의 수많은 악취미 중 일부일 뿐이지. 아무 생각 없이 머릿속을 차갑게 하고 단어를 나열해 퍼즐을 맞추기 시작한다. 와인의 딸기향과 오늘 지나가면서 본 어느 쇼핑센터의 레드와 그린 장식 같은 사소한 게 무언가를 움직여 잊고 있던 것들이 다시 돌아온다. 새벽 3시, 빙 크로스비의 캐롤이 흐르는 아무도 없는 24시간 쇼핑센터. 분스베리를 한 병 집어들고 5천원짜리 지폐를 내민 뒤 자전거의 페달을 굴려 차갑고 딱딱한 엷은 눈발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었던 어느 크리스마스. 집에 돌아와서는 덤으로 받은 판촉용 와인잔에 싸구려 와인을 따르고 조그맣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목소리를 내다가 내 목소리에 그만 내가 놀라 버렸었던. 머릿속이 그런 것들로 갑자기 가득 차 버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런 게 그리운 건 아닌데도.
와인 두 병의 효과는 상당히 좋아서 잊고 있었던 퍼즐들이 순식간에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가장 소중했던 것들을 다시 찾은 것만 같아. 그러나 알고 있다. 절대 맞춰지지 않을 그림. 그걸 하나하나 맞추는 건 사실은 아무 의미 없다는 것, 네가 다시 전화를 하고, 지나버린 무언가에 대해 얘기를 해도 결국엔 잊는 편이 낫다는 것도. 내가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것은, 끝난 것이다.
그저 그 뿐이다.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퍼즐을 맞추려는 시도 따윈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결국엔 그저 그런 결론. 이걸 변화시키려면 와인 두 병으로는 어렵겠지.
정말 다행이야. 와인 두 병이 적량인 내 자신이.

지금은 이걸로 됐어. 고마와요^^
# by | 2006/11/23 00:48 | 개삽질-_-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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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핸드백과 구두! :) 과연..(퍽)
적당한 핍박과 빈궁은 사치를 더 반짝이게 해주지요. 재미있는 새 한 해 맞으시기를, 한 달 먼저 송년 인사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