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글을 써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문장으로 시작해야 하는 걸까 생각했지만 특별한 답이 나오지 않아 그냥 심플하게 시작하기로 한다.

10월 초에 친구가 죽었다.
나는 그 사실을 다른 친구를 통해 10월 중순에야 알게 된다. 장례식도 없이 시신은 바로 재로 변했고, 그애의 어머니는 새로 바뀐 핸드폰에 남아 있는 몇 개의 전화번호들에게 이 사실을 얘기한다.
그 중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애와 나는 몇년전에 격렬하게 싸웠고, 공유하던 모든 친구들을 곤란하게 만들면서도 좀처럼 화해를 하지 않는다. 사실은 둘 다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거지. 그 상태로 어린아이 둘은 서른의 크리스마스를 넘긴다. 이제 둘은 조금 더 어른에 가까와졌다. 가끔씩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언젠가는 화해해야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좀처럼 타이밍을 잡기 힘들다. 하지만 올해 크리스마스 쯤엔 괜찮겠지. 이젠 언제, 왜,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으니까 이쯤 되면 적당한 걸 거다. 그래서 넌지시 공통의 친구들에게 그런 얘기를 띄운다. 곧 서른 세살. 화해하고 지나간 모든 걸 생각하며 같이 웃기에 좋은 나이. 다시 열 아홉 살의 크리스마스처럼 모두 모여서 그때보다는 조금 비싸진 와인을 따고, 고기를 먹지 못하는 그애를 위해 달콤한 디저트와 야채로 만든 스튜 같은 걸 차린 식탁 위로 몸을 기울이면서 시덥지 않은 남자 얘기와 직장 얘기를 나누며 서른 세 살을 같이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싸운 다음에 화해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 한켠의 리본을 슥 하고 잡아당기면 뚜껑이 열리고 그때 이후로 멈춰진 모든 것들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진심 따위가 통할 리 없지. 
이제 남은 것은 기억 뿐이고 대부분의 경우처럼 그것은 잠을 방해하는 것 외엔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래서 나는 맥베스 부인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불길한 징조를 떠올리듯 자꾸 무언가를 생각한다. 모두가 수학여행을 떠나고 둘만이 남아있던 교실. 나는 세로줄로 씌여진 스티븐 킹의 쿠조를 읽고 있고 그애는 이미라의 순정만화를 읽는 것으로 첫 장면이 시작된다. 둘은 금방 가지고 있는 책을 다 읽어 버려서, 이전에는 얼굴만 아는 사이였음에도 자연스레 가지고 있는 책을 바꿔 읽는다. 수학여행이 끝나고 모두가 돌아올 때쯤, 전공이 달라 앞으로도 단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학교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병원에 입원해서 누워있는 내게 그애가 가져온 건 이병우의 기타가 녹음된 테이프다. 선물로 받은 멜론을 나누어 먹으며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을' 을 재생한다 썰렁한 병실은 곧 기타 소리로 가득찬다. 새벽 5시 반, 어둑한 교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만화책 40권을 쌓아놓고 읽으면서 사는 게 조금은 즐겁다고 생각하고, 침침한 복도 끝 먼지가 쌓인 문 뒤에서 인스턴트 토마토소스로 만든 푸실리를 점심으로 나눠 먹고 책 얘기와 만화 얘기를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며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미 그애의 친구가 된 나의 친구들과 함께, 다 같이 모여 19살의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케이크를 사고, 감자를 넣은 크림 스프와, 치즈랑 야채를 얹은 빵. 복숭아맛의 분스베리 같은 것을을 식탁에 잔뜩 차려놓고 다 같이 촛불을 불어 껐을 때 우리는 분명히 행복했었던 것 같아. 그리고 이제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
나이를 먹고도 이런 시간들이 계속된다. 유성이 많이 떨어진다는 어느 여름밤, 모두 다 같이 돗자리에 누워 별을 보면서 바그너를 듣고, 그 애의 학교에 놀러갔다가 해운대를 산책하고, 부대 앞 맥도날드에서 콜라를 마시며 더위를 식히기도 하고, 밤에는 맥주를 마시고 사이좋게 당구를 친다. 둘 다 많은 일들을 겪지만 언제든 만나게 되면 서로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그냥 농담이나 하면서 가볍게 시간을 보내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어른이 되어 있다면 꽤 좋을 것 같아. 그렇지 않니? 응 그러게.
둘은 20대의 후반에 처음으로 크게 싸운다. 아마도 남자 문제가 좀 있었던 것 같고, 집안 문제가 있기도 했고, 그래서 술을 무척 많이 마셨고. 아주 예민해져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처음이자 마지막 싸움은 그 둘을 당혹하게 한다. 그래서 이 글의 맨 처음으로 이어진다.
그애가 왜 죽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해서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모든 신문과 뉴스에서 본 끔찍한 사건들이 그 애의 경우로 치환되고, 나는 지나친 상상을 지우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약속을 잡고 누군가를 만나거나 한밤중에 기나긴 전화를 한다. 음악은 듣지 않지만 섹스는 아마도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조금 울었다. 
그 뒤 한달 정도가 지났다. 아직도 제대로 잠을 자기가 어렵지만 숨쉬기는 조금 편해졌고, 이젠 버스를 타거나, 미술관 앞을 지나거나 해도 그 애의 생각은 잠깐 머릿속을 스쳐갈 뿐이다. 이제서야 무언가를 끄적일 수 있을 것 같다. 블로그를 열고 새글쓰기를 누른다. 글을 쓰면서 후아킨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즈 협주곡을 듣다가 이병우의 CD를 재생시킨다. 기타 소리는 변하지 않고 그 예전의 병실처럼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잊어간다. 




        

by kyoko | 2007/11/12 01:50 | 개삽질-_- | 트랙백 | 덧글(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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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11/12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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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11/12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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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11/12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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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백랑 at 2007/11/12 03:02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빚이다.
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언제 읽은 건지.. 방금 만들어냈는지는 모르겠네요..

잊어가는 것에 힘들어하지 마세요..
단지 잊은 것 뿐입니다.
분명 언젠가 다시 생각나서 지금의 감정이 다시 돋아날 것입니다.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면 그걸로 된 겁니다.
그러니 지금의 망각에 죄스러워 하지 마세요.
살아가는 것은 빚이 아니라 어떤 의미도 부여할 필요 없는 삶, 그자체라고 생각합니다.
힘내세요..
Commented at 2007/11/12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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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11/12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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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Core_Geek at 2007/11/12 09:27
상처로써 기억되는 사건들은 시간이 약인 거 같습니다.

살면서 희노애락을 겪는다는 게 좀 더 큰 어른이 되어 가는 계단에 한발자국 올라가는 거겠죠.
Commented by 물속인간 at 2007/11/12 09:30
친구가 죽는건 어른들 돌아가신 것과는 많이 틀리더군요. 그저 잘 헤쳐나가시기만...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지만 어떻게 다 같겠습니까. 위로도 어설프단 맘이 듭니다.
Commented at 2007/11/12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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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11/1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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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11/1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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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뚱띠이 at 2007/11/12 11:05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은 망각이랍니다....조금씩조금씩 잊어가면서 그만큼 더 삶을 진행시키는 것이겠죠.
Commented by zip0080 at 2007/11/12 12:54
일하기 싫다.... 출근하기 싫다... 은나아~~
Commented at 2007/11/1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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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홍군 at 2007/11/12 15:02
읽으면서 하루키의 소설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태클인생 at 2007/11/12 21:55
가슴깊이 공감합니다.

그 응어리진 마음을 글로 표현할수 있는것만으로도 쿄코님을 존경하게 됩니다.

기억이 추억이 되어 쿄코님의 마음 한구석에 어떠한 형태로 남아있는 이상 떠나신 그분도 섭섭해 하지 않을거에요.

언제나 그렇지만 쿄코님의 글은 깊은밤 술한잔을 생각나게 하는 힘이 있네요.

오늘도 그 유혹에 넘어가고 맙니다;;
Commented at 2007/11/12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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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che7 at 2007/11/13 00:15
오랜만에 안사람과 같이 영화(색계)를 보고 왔씁니다
영화가 무척이나 좋아서 ..섬세한 감정의 변화를 풀어나가는 거장의 매력에 빠져서
무척이나 행복한 시간이 였습니다
매홎적이 탕아가씨의 몸매는 뽀너스고유ㅠㅠ....
꼬님도 한번 보시고 이바구좀해달라고 왔더니

슬픈 일이 있엇군요
나이가 들면서 살아오면서 저에게 슬픔을 치료하는 방법은
첫째는 구여운 딸래미를 안고 사랑한다고 외치는것이고
둘째는 진로소주 원쌋입니다
첫번째 방법은 님께서는 불가능하니
두번째 방법으로 슬픔을 달래보시기를 바랍니다....
Commented by 스마슈 at 2007/11/13 02:46
... 명복을 빕니다...
Commented at 2007/11/13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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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11/13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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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11/1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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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quanox at 2007/11/14 01:50
저도 가장 오랜 친구였던 사람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번 크게 싸우고 2년 가까이 연락을 끊고 지냈었었습니다...만약 그 사이에 그사람에게 무슨일이라도 생겼다면 정말.. 아마 평생 땅을 치고 후회했을겁니다만.. 다행히 그 친구는 평소대로 건강하게 잘 지냈는지 먼저 연락해왔고 타이밍을 기다리던 저도 곧바로 사과하고 다행이었네요.....쿄님..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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