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08일
그러지 않는 게 좋았겠지만.
컴퓨터 책상은 바로 베란다 창문 옆에 있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이곳저곳을 클릭하다 보면 바깥의 소리가 들려 온다. 여름내내 개구리 소리를 들었던 것도 잠시, 지금은 빗소리다. 11월 초, 새벽 4시의 빗소리.
최근 이것저것 많은 일이 있었다. 어이없는 일에도 말려들고, 집안에도 조금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올해의 대부분을 쏟아부었고 올해 내로 결과가 나리라 생각했던 일은 내년 초로 미뤄졌으며, 몇 사람에 대해 실망하거나 피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고, 아주 오랜만에 잊고 있던 사람의 소식을 들었다. 아주 친하진 않지만 안면이 있는 사람의 부고를 들었다. 깨어 있을 동안은 그런 것들에 대해 가급적 생각하지 않으려 하지만 언제나 문제는 잠들기 바로 전. 바로 그 때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 새 잠이 들고 좋지 않은 꿈을 꾼다.
그런 식으로 잠을 설치는 것보단, 차라리 개삽질이언정 무언가를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11월, 새벽 4시. 귓가에 들리는 건 빗소리와 평균율 뿐이다. 병신같이 삽질을 하기엔 완벽한 조건. 그럼 삽질을 좀 해야 예의지 하하.
내가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다면 나는 연애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연애가 처절한 실패작이었거나, 혹은 내 남자친구들이 모두 개새끼였거나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그 애들은 대부분 다 괜찮은 애들이었으며, 충분히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고 장점이 있는 애들이었다. 물론 지금 같아서는 절대로 사귀지 않을 애들과 이상하게 얽힌 일도 있었지만 그건 어릴 때의 일이고, 나는 대체로 착하고 예민하며 비교적 정상적인 집안에서 반듯하게 자란, 정치적 관점이 비슷하고, 전반적으로 말이 통하며 자존심이 강하고 똑똑하고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을 사귀었었다. 친구로 사귀기에는 더할나위없는 조건이다. 연애를 하기에도 아마 괜찮은 조건이었을 거다. 그런데 왜? 결국엔 내가 문제지. 왜 아니겠어?
모든 연애에는 끝이 있다. 결혼을 한다고 해도 성공한 연애는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을 멀리 갈 것도 없이 나의 부모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트라우마 따위가 아니라 그냥 사실을 얘기하는 거다. 오히려 끝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말하자면 언젠가 끝이 날 것이기 때문에 같이 있는 시간을 더욱 더 소중히 여기는 그런 것이었다. 상황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내 나름대로는 잘 해주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난 기본적으로 내 생활이 너무나 소중한 인간이다. 많은 부분에서 맞추어 나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는 살갑거나 애교가 많은 인간도 아니었고, 지나친 참견은 실례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연애가 아닌 자립이었고 결혼은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거리감각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 덕분에 연애를 하면서도 많이 외로웠지만, 그건 나 혼자만의 몫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내가 상대편에게도 나와 같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내 남자친구들은 나를 사랑해 주었고, 착하고 다감했으며, 나와 결혼을 하고 싶어했고, 조금 더 오래 사귀기를 원했다. 덕분에 내 연애는 대부분이 몹시 길었고 대부분이 친구의 연장선상이었으며, 친구를 잃지 않기 위해 연애를 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록 납득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생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연애가 옳을 리 없다.
모두가 친구로 시작했지만, 친구가 아닌 채로 끝났다. 가끔 친구로 남는 녀석도 있다. 하지만 예전같진 않다. 어쩔 수 없는 거지. 섹스? 섹스 따위. ㅅㅂ 나이 서른 넷에 이따위로 성욕이 거세될 줄 알았다면 적당히 원나잇이나 하면서 버티는 건데 그랬지... 잠시 눈물 좀 닦고.
다시 얘기하자. 내가 지금 아는 것들을 그 때 알았다면 나는 절대로 연애 따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그 애들과 계속해서 친구로 지냈을 것이다. 가끔씩 만나 맛있는 걸 먹고, 술을 마시고, 시시콜콜한 인생 얘기를 하며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농담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 중엔 결혼을 하고 직장이 생기면서 조금씩 멀어지고 자주 보지 못하는 놈들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쪽을 선택하는 게 '내게는' 옳았던 거다.
친구를 잃는 것보단 연애를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정말이지.
Glenn Gould plays Bach Well-Tempered Clavier Preludium & Fuga C-sharp minor BWV852.
평균율 중에서도 무척 좋아하는 BWV852. 특히 뒷부분 푸가를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평균율은 언제나 옳아.^^
# by | 2009/11/08 04:58 | 개삽질-_- | 트랙백 | 덧글(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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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율은 언제나 옳습니다.
그 몫까지 제가 고민할건 아니여도;; 그래도; 친구를 잃고나면 서운하더란거 ㅠ
그래서, 아는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가도, 또 두렵기도하고-
하지만, 결국 시작을 고민하고 있다는 건, 아직 그만큼 빠져들은 것이 아니니까, :S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시작해도, 늦지않겠죠, 뭐 :)
+
전, 요새 새삼 Toccata and Fugue in D minor에 새삼 빠졌는데-
평균율도 좋네요, :)
비오는 일요일 아침, 딱 좋은 것 같아요-
거리를 지키는 것과, 그사람에게 맞춰주는일. 그 사이에서 한참 해메다 도루묵.
평균율 좋아요. :)
전 좀 다른 상황이었지만 저 말에 무척이나 공감합니다.
결국 다 내 탓이라는 자조로 끝날 뿐인 연애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자신없는 게 왜 이리 많아질까요.
요새는 진짜 자존심보다는 가짜가 많아서들 문제지만 자존심없는 사람과 가까이 하는 건 너무나 힘이 듭니다. 하아....
그래도 저는 알면서도 그 연애 따위를 너무 좋아한답니다.
저는 역으로 쿄~님께서 갑자기 이런 생각을 손가락을 통해 네뜨에 펼치게 된 이유가 뭘까 생각하게 됩니다.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저는 두 아이의 아빠입니다. 아내와 TV 채널 가지고 싸우는.
아내는 무한도전을 좋아합니다. 저는 별로죠. 정형돈이 안웃기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최근에 하이킥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IPTV로 지난회를 하루에 5개씩 보곤 하는데 아내가, 특히 김자옥과 오현경이 싸우는 장면에서는 화를 냅니다. 보기 싫다면서...
저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그렇죠. 둘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 특히 같이 늙어가는 다정한 부부를 보면 부럽습니다. 그게 늙는다고 다 되는 게 아니더라구요. 신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 없으니 교회에 갈 수 없는 거고, 주고 준 만큼 받길 원하니 가정에도 평화가 오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강건너의 풍경이 부러울 뿐입니다. 그저 결과가 부럽다는 것이지 과정까지 부럽지는 않습니다.
아마 저처럼 결과가 부러우신 것 같습니다.
이누이트 블로그드에서 뇌에 관한 책을 찾아서 읽어 보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뭐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댓글이 너무 건방지게 어려워서 또 죄송합니다.)